전 울 시어머니 생각만 하면 정말 대단한 분이다, 입장 바꿔놓고 내가 만일 울 시어머니 입장이었으면 그렇게 살아올 수 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어린 나이에 시집 왔을 때 그 어려움을 울 시어머니의 넉넉한 마음 때문에 잘 이겨낼 수 있었기도 하구요. 그리고 무엇보다 45년 시집살이, 그 어려운 시절을 묵묵히 참아오신 것 그저 저는 감사할 수밖에 없답니다.
울 시어머니 18살에 시집 오셨다고 합니다.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 진학하고 싶은데, 당시 시골 할머니들이 여자가 배워서 어디 쓸꺼냐며 좋은 혼처 났으니 시집가라고 그렇게 등떠밀려 울 시아버님께 시집 왔는데, 지금도 그 때 어머니가 공부 좀 더 하게 두었더라면 내 팔자가 어떻게 폈을지 모른다며 많이 아쉬워 하시네요. 그도 그럴 것이 공부를 굉장히 잘하셨더라구요. 웅변도 잘하고 또 지도력도 있으셔서 군 내에서 꽤 유명세를 탔다고 하시네요.
그런 시어머님에 비해 아버님은 일단 고졸 출신으로 학력은 어머님보다 위지만 그렇게 명철하신 분은 아니신 것 같습니다. 일찍 상처하신 홀어머니 밑에 독자로 떠받들려 자라온 탓에 사람들에게 그렇게 칭찬받는 모범생은 아니었구요. 두 분이 함께 살아오시면서 여러 일들을 겪는 동안 시아버님이 하겠다고 고집 피워서 제대로 된 일은 거의 없고, 도리어 어머니가 이리 하자 했던 일들은 대부분 좋은 결과를 낳았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시아버님은 어머님에 대한 열등감 같은 것이 엿보입니다. 그리고 이때문에 젊어서는 어머님을 많이 구박하였고, 또 시할머니께서 곁에서 거드셨죠.
그리고 아버님과 할머님 두 분 다 주벽이 심하셔서 술만 먹고 들어오시면 집안을 거의 다 때려 부수기도 하고, 어머니를 많이 구타하시기도 했다네요. 번듯한 직장 잘 다니시다가 술 드시고 절제가 되지 않아 윗사람과 대판 싸워서 퇴사하셨으니 그 성품 짐작하시겠죠? 하루는 아버님이 술드시고 와서 행패부리면 다음 날은 할머니가 또 그러시고, 두 모자가 그렇게 번갈아 가며 어머니를 괴롭히셨으니 그 고생이야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습니까? 제 남편도 어릴 적 생활을 떠올리며 잊혀지지 않는 것이 그렇게 아버님이 주벽이 심해지신 날은 모두 그 아랫집으로 피신해서 혹시나 아버님이 찾아올까 싶어 가슴 졸이며 숨어있었던 기억이 가장 먼저 떠오른답니다.
하도 고생이 심해 이혼하던지 아님 야반도주를 할까 생각했던 적도 여러번이었답니다. 어머니를 아시는 주변분들이 당신 같은 사람이 왜 그런 집에서 사느냐며 차라리 혼자 살아도 지금보다는 낫겠다며 이혼하라고 부추겨도 그렇게 끝까지 그 자리를 지킨 이유가 바로 자식 때문이었다고 하네요. 어머니의 그런 희생에 울 남편 형제들 모두 지금은 나름 잘 삽니다. 대학교수도 있고, 학교 선생님도 있고, 대기업 간부도 있구요.
한번씩 저에게 울 어머니 그래도 내가 잘 참았지 하시면서 웃으시는데, 그 웃음에 참 많은 회한이 담겨있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울 남편 그런 어머니를 잘 아니 어머니 명이라면 거절을 못하죠. 전 그런 효자 남편때문에 좀 많이 힘들긴 했지만요. ㅎㅎ 또 한편으로 어머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어머님이 그리 참아주신 덕에 그리고 그런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자식들 잘 키워주신 덕에 제가 이렇게 좋은 남편 만나 알콩달콩 살아가는 거죠.
저희 시어머니십니다. 그 옆에 있는 것이 저구요.
울 남편요~ 자기 생일날이 되면 아침 일찍 어머님께 전화를 겁니다.
"엄마요? ㅎㅎ 장남이지. 어머니 오늘 제 생일입니다. 절 낳아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어머니 사랑합니다."
그러면 수화기 너머로 넉넉한 어머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그래 우리 장남 생일 축하한다. 나도 사랑한다."
그런데 그 말씀이 끝나기가 무섭게 울 아이들 줄서서 할머니에게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할머니 울 아버지 낳아주셔서 감사해요. 사랑해요."
그렇게 큰 애가 말하고 나면, 둘째는 잘 길러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하고, 셋째, 넷째, 모두 차례로 수화기를 돌려가며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어머님에 대한 감사가 끝나면 아버님이 받으시죠. ㅋㅋ 아버님은 항상 두번째입니다. 울 남편 아버님에게도 같은 인사를 드리고, 울 아이들 역시 할어버지에게도 같은 인사를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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