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삿짐을 정리하면서 이제 버릴 것을 거의 버려가고 있습니다. 정말 버리는 것이 이리 힘들 줄 몰랐습니다. 법정 스님이 무소유는 가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쓸모 없는 것을 가지지 않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 말이 이삿짐을 챙기면서 더욱 가슴에 와닿습니다. 왜 이리 필요없는 것을 이렇게도 많이 챙기고 살았을까? 후회가 되기도 하구요.
그런데 저랑 울 남편이랑 성향도 성격도 많이 다르다 보니 이삿짐에 있어서도 티격태격합니다. 저는 "그냥 다 버려"라며 필요없다 싶은 것은 다 박스에 담으려고 하고, 남편은 그걸 왜 버리냐며 다시 꺼집어내서 챙깁니다. 그러다 좀 언쟁이 붙고 안되겠다 싶으면 제가 좀 큰 소리를 지르면 울 남편 알았다면 꼬리를 내립니다. ㅎㅎ
그런데 그렇게 짐정리를 하는 중에 울 신랑 제게 종이 쪽지를 하나 주면서
"이것도 버릴까?"
그 표정, 뭔가 비밀이 있는 듯한 그러면서도 장난기 가득한 표정입니다. 이런 표정은 꼭 저를 놀릴 때 써먹는 표정인데..뭘까? 궁금한 마음에 보았더니 ㅎㅎ 20년전 제가 남편에게 보낸 연애편지입니다. 꼼꼼돌이 울 남편, 이걸 20년이나 잘 간직하고 있었던 겁니다. 가만 보니 웬 작은 박스에 편지와 엽서들이 가득하네요. 아마 남편에게 온 편지를 간직하는 함인가 봅니다. 제일 윗쪽에 다섯통의 편지가 고이 놓여 있는데, 남편 말로는 이게 다 제가 남편에게 보낸 편지랍니다. 제 기억에는 두 통 밖에 없는데 언제 세 통을 더보냈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네요.
예전 연애할 때 울 신랑은 서울에 있었고, 저는 부산에 있었습니다. 주말마다 만나서 데이트를 하긴 했지만 울 남편 그 동안에 엄청나게 많은 편지를 보내주었답니다. 또 한 번 보낼 때 분량도 보통 10장 이상이었구요. 편지 받을 때마다 이 사람 국문학 한 것이 맞긴 맞구나 싶더군요. 그런 남편의 편지에 저는 세번 걸러 한 번, 열번 걸러 한 번, 뭐 그런 식으로 답장해주었고, 길어야 두 장정도 ㅎㅎ 문장이 짧아서 더 길게 쓸 것도 없더라구요. 한 번씩 울 신랑 자기가 너무 손해본다며 투정부리면 또 한 통 보내주고 그랬는데, 울 신랑 그것을 모두 다 간직하고 있을 줄이야..
솔직히 편지를 받아들고 읽으려고 하니 두근거리더군요. 편지 봉투를 보니 첫번째에는 00씨 귀하로 되어 있고, 나머지는 모두 00오빠에게로 되어 있네요. ㅎ~ "오빠?" 편지 내용도 보니 "보고 싶은 오빠에게 ~" 어우 , 울 신랑 오빠라고 불러본 게 언젠가 싶습니다. 편지 내용을 읽어보니 이 편지 받은 울 오빠 좀은 황당했겠다 싶습니다. 그리 할 말이 없었을까요? 내용을 보니 당시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질투"라는 드라마 내용을 적어놨네요.
한 장을 다 읽으니 또 다른 것을 보여줍니다. 그렇게 우린 이삿짐 정리하다 말고, 20년전의 그 애틋했던 연애시절로 시간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편지를 읽으며 그 때 그 꽃다운 시절로 돌아가는 느낌이 들구요, 가슴이 콩닥콩닥거리는 것이 새롭게 연애하는 기분이 듭니다.
두번째 편지를 보니 부르는 호칭이 또 달라졌습니다. "너무나 보고싶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어우 ㄷㄷㄷ, 갑자기 닭살이 돋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편지에는 "그리운 사랑하는 오빠에게" 이렇게 되어 있네요. 전 아무리 생각해도 울 남편을 오빠라고 불러본 기억이 별로 없는데, 편지에는 구구절절 오빠네요. 편지를 읽다말고 제 남편을 바라보며 "오빠~~" 하고 불러주었습니다. 울 남편 갑자기 빵 터집니다. 지금도 오빠라고 불러주니 좋은가 보네요. ㅎ 이럴 줄 알았으면 한 번씩 불러주는건데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제가 신기한 것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바로 연애시절 남편이 적었던 일기장입니다. 들킬까 싶어 딴 짓하는 척하며 살며시 한 장씩 읽어나갔는데, 제 예상대로 내용의 대부분이 저에 관한 것이더군요. " 아~ 이 사람 이렇게 나를 생각하고 살았구나" 갑자기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감동이 살며시 밀려옵니다. 그러다가 제 눈에 눈물이 살며시 고이는 걸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 일기장 남편 몰래 저만 아는 장소에 살며시 갖다 놓았습니다. 한번씩 두고 두고 읽으려구요.
저녁에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 제가 울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
"애들아 아빠가 옛날 엄마랑 연애할 때 엄마를 뭐라고 불렀는지 아니?"
울 아이들, 벌써 이거 닭살 멘트 시작하려고 하는구나 싶었는지, 알기 싫다며 고개를 흔들고 딴청을 피웁니다. 울 남편은 눈이 똥그랗게 뜨고는 제가 어떻게 대답하는 지 궁금해합니다. 좀은 겁을 먹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ㅎㅎ 그러거나 말거나 제가 문제를 내놓고, 답도 제가 해주었습니다. 아주 큰 소리로요.
"이 세상에서 제일 예쁜 천사~ 아빠 일기장에 그렇게 적어놓았더라"
오늘 밤은 아주 단잠을 잘 것 같습니다. 혹시 아나요? 그 시절 연애하던 꿈을 꾸게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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