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초대 재무차장으로 활동한 우산 윤현진 선생
제가 살고 있는 경남 양산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로 우산 윤현진(1892∼1921) 선생님이 있습니다.
윤현진 선생님은 1892년 9월 동래 부윤을 지낸 윤필은과 김안이의 2남 4녀 중 차남으로 양산시 상북면 소토리 내전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우리 지역의 또 다른 독립지사인 이규홍 선생님의 대석리와 바로 이웃해 있는 동네입니다.
우산 선생님은 15살 때인 1907년 숙부 윤상은이 창설한 부산 구포의 사립 구명학교를 졸업(1회)하고, 17세 되던 1909년에 중국의 남경·북경·상해 등지를 순회하면서 국제정세를 익혔습니다. 그리고 1912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메이지 대학 법학과에 입학했지만 학업을 다 마치지 못하고, 1914년 대학을 중퇴하여 귀국했습니다.
귀국 후에 부산에 있는 백산 안희제 선생과 함께 백산상회를 경영하였고, 대동청년단에 가입하면서 많은 독립투사와 교분을 맺었습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경남은행 마산지점장 자리를 떨쳐버리고, 그해 3월 21일 상해로 망명, 같은 해 4월 안창호·이시영·이동휘·노백린·김구·김규식·여운형·신익희·이동녕 등과 상해임시정부 수립에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임시정부 의정원과 초대 재무차장을 역임하면서 임정의 재정난을 타개하려고 고향의 사재 30만 원을 헌납하였고, 임정의 내분을 수습하는 등 수많은 어려운 문제 해결에 선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선생님은 1920년 독립신문사를 주식회사로 확장하고 발기인이 되었다. 임시정부의 활동이 벽에 부딪혀 임시정부를 개혁하고 운동노선을 재정립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자, 1921년 5월 안창호(安昌浩)와 함께 국민대표대회기성회를 조직하여 임시정부의 권위를 인정한 위에서의 개혁을 위해 힘을 쏟았습니다.
그러다 과로로 병을 얻어 광복의 한을 풀지 못하고 1921년 9월 17일(음력 8월 16일) 순국하였고, 상해 임시정부는 국장으로 장의를 엄수한 뒤 정안사 외인묘지에 안장했습니다.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고, 1995년 6월 대전국립묘지에 봉환 안장됐습니다.
선생님이 요절하자 일본의 〈아사히〉 신문은 "형극의 배일 수완가 윤현진의 사"라는 제목하에 그의 죽음은 임시정부의 패망이라고 논평했을 정도로 임시정부에서 선생님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습니다.
현재 양산시는 윤현진 선생님의 선양사업을 본격화하고 있습니다. 윤 선생에 대한 학술연구용역에 이어 흉상 건립과 만화제작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학술연구용역 결과 윤선생님의 활동에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윤 선생님은 국내 최초로 농민소비조합인 '양산소비조합'을 설립 운영해 농촌경제 부흥과 일본 상품 배척을 통한 민족사상을 고취한 것으로 확인되었고, 파리장서가 된 독립청원서를 영문으로 번역한 사실도 찾아내었습니다.
시는 최근 윤 선생의 흉상 건립을 위해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5000만 원을 들여 오는 11월 말까지 2.4m 높이의 청동으로 제작하기로 했습니다. 이 흉상은 윤 선생이 임정 재무차장으로 활동할 때 찍은 사진을 토대로 당시의 얼굴과 양복 입은 모습을 참고해 인물상과 복식을 재현하여, 교동 춘추공원 내 윤 선생 기념비 옆에 설치된다고 합니다. 윤 선생님의 기념비는 1959년 양산 군민의 이름으로 세워진 것입니다.
지난 해 발족한 양산항일독립운동기념사업회는 선생님의 기념비가 있는 교동 춘추공원 내에 '독립공원' 조성을 추진하고 있으며, 시는 4억 원을 들여 춘추공원 진·출입로 개선 등 정비 사업을 진행 중입니다.
또한 1600만 원을 투입해 선생의 유년시절과 임정 활약상, 고향 양산에서의 항일운동 등이 담긴 선생의 일대기를 담은 만화를 제작하여 지역 내 학교와 도서관 등에 배포해 교육 자료로 활용하기로 했습니다.
양산항일독립운동 기념사업회 지원으로 중국 상해임시정부를 순례하며 윤 선생의 당시 활약상을 조망하는 행사와 윤 선생의 항일독립운동을 주제로 한 학술대회도 개최할 계획이며, 향후 생가 복원 및 기념관 건립 등도 검토하고 있다 합니다.
by 우리밀맘마 저의 동맹블로그 레몬박기자 오늘의 사진 바로가기 ☞클릭 *이 글이 유익하셨다면 추천 하트 한 번 눌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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